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요한복음 3:29~30 –
신랑친구의 기쁨
예수님의 유명세가 더해가고 있을때 한 제자가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세례받으러 간다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한 말의 일부가 오늘 묵상한 본문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는 주인공이기에 최고의 기쁨을 누리지만, 그 옆에서 돕고 신랑을 빛나게 해주던 신랑의 친구도 한없이 기뻐한다고. 신랑의 친구의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그런 기쁨이 충만하다고 하고는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본인은 쇠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의 친구의 기쁨을 생각해 봤습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이지만 신랑의 친구도 같이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잘 되니 같이 기뻐합니다. 기쁨의 정도나 종류가 다를 수는 있지만 신랑이 소중한 친구일 수록 기쁨을 함께 누리고 나눌 수 있습니다.
그 결혼식이 자신의 결혼식이란 착각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제대로 알면 그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올바로 알고 있다면 가능합니다.
세례요한의 그러한 기쁨이 가능한 이유도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올바로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먼저 와서 외치는 목소리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늘에서 난자, 성령의 말씀을 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신랑이요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랑의 친구라고 주인의식도 없이 생각없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의 친구로서의 역할은 제대로 해 줘야 합니다. 어떠한 주인의식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뿐인거죠.
주인의식은 주인공 의식과는 다릅니다. 맡겨진 ‘사명’이 중심인가 ‘나라는 사람’이 중심인가로 분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사명에 대한 책임감인가 나를 드러내고픈 인간적인 욕심인가로도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인가 아니면 주인의식을 가지고 나의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사람인가의 차이입니다.
많은 자리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크리스천들이 점검해 봐야 하는 사항인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봉사하고 일하고 섬기고 있는가.
내가 주인공이길 원하는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청지기로 섬기는가. 나는 신랑인가 신랑 친구인가. 나는 주인공인가 주인의식을 가진 청지기인가.
크리스천은 예수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신랑이 아닌 신랑의 친구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했던 세례요한이 누렸다던 신랑 친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신랑이라는 착각,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만 없다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 아래서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함으로 이미 허락하신 그 기쁨을 충분히 감사히 누릴 수 있는 인생으로 이끄시길, 신랑되신 주님을 기뻐하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허락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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